AI 시대인데 왜 더 심심하다는 말이 나오나…‘트렌드 코리아 2027’ 권태사회, 통계로 보니
김난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내년 핵심 키워드로 ‘권태사회’를 제시했지만, 이를 곧바로 확정된 사회 진단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공식 통계에는 ‘권태’를 직접 재는 단일 지표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가시간, 여가 만족도, 삶의 만족도, 혼자 보내는 시간, 미디어·ICT 사용 같은 지표를 함께 보면 이 전망이 어느 범위까지는 실제 현상과 맞닿아 있고, 어디서부터는 해석의 영역인지 구분할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그림은 단순하지 않다. 한쪽에서는 여가시간이 늘고 삶의 만족도와 여가 만족도가 함께 개선된 지표가 나온다. 다른 한쪽에서는 여가가 동영상 시청과 휴식에 쏠리고, 혼자 보내는 비중과 외로움 인식이 올라가는 흐름도 보인다. ‘권태사회’는 이미 통계로 증명된 결론이라기보다, 이런 상반된 흐름을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가깝다.
여가시간은 늘었지만, 여가의 질까지 좋아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통계청의 202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를 보면 10세 이상 국민의 하루 평균 여가시간은 5시간 8분으로 2019년보다 21분 늘었다. 연령별로는 60세 이상이 6시간 36분으로 가장 많았고, 30대는 3시간 59분으로 가장 적었다. 여가시간 자체만 놓고 보면 ‘사람들이 쉴 틈 없이 살아서 권태를 느낄 여유조차 없다’고 보기보다는, 적어도 총량 면에서는 여가가 오히려 늘어난 쪽에 가깝다.
문제는 그 여가가 어떻게 채워졌는가다. 같은 조사에서 여가시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활동은 미디어 이용으로 2시간 43분이었다. 30대 이상은 여가시간의 절반 이상을 미디어 이용에 썼다. 또 미디어를 이용한 여가활동 중 ICT 기기 사용시간은 1시간 8분으로 2019년의 36분보다 32분 늘어 약 두 배가 됐다. 여가의 양은 늘었지만, 그 증가분이 대면 활동이나 새로운 경험보다 화면 소비 쪽으로 기운 셈이다.
2025년 사회조사도 비슷한 결을 보여준다. 13세 이상 인구가 현재 하고 있는 여가활동은 주중과 주말 모두 동영상 콘텐츠 시청과 휴식이 가장 많았다. 반면 향후 하고 싶은 활동은 관광 활동 65.7%, 취미·자기개발 활동 41.7% 순이었다. 지금 실제로 하는 여가와 앞으로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여가 사이에 뚜렷한 간격이 있다는 뜻이다.
삶 만족도는 올랐는데, 혼자 보내는 시간과 외로움도 함께 늘었다
‘권태사회’ 진단을 곧장 뒷받침하지 않는 통계도 적지 않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의 비중은 75.6%로 전년보다 1.5%포인트 상승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비중도 76.3%로 7.9%포인트 올랐다. 사회 전체의 주관적 안녕감이 일률적으로 악화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여가 만족도 역시 악화 일변도는 아니다. 2025년 사회조사에서 평소 여가생활에 만족한다는 비중은 39.4%로 2년 전보다 5.1%포인트 높아졌고, 불만족 비중은 15.9%로 2.7%포인트 낮아졌다. 만약 ‘권태사회’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더 불행하고 무기력해진 상태로 정의한다면, 이런 수치는 그 주장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러나 같은 자료 안에는 다른 신호도 있다. 2024 한국의 사회지표에서 19세 이상 국민 중 ‘외롭다’고 느끼는 비중은 21.1%,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고 느끼는 비중은 16.2%로 모두 전년보다 증가했다. 생활시간조사에서는 2024년 평일 기준 아침 식사를 한 사람 중 혼자 먹은 비율이 41.7%로 2019년보다 2.9%포인트 올랐고, 점심과 저녁의 혼밥 비중도 함께 상승했다. 사회조사에서도 주중 여가를 혼자 보낸다는 비중이 31.3%로 가족 다음으로 높았다.
삶의 전체 만족도는 개선되는데도 일상 감각 차원에서는 더 고립되고 더 혼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 모습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얘기다. ‘권태사회’라는 표현이 통계적으로 곧바로 입증된 것은 아니어도, 적어도 관계의 밀도 저하와 반복적 화면 소비의 확대라는 배경은 확인된다.
핵심 제약은 ‘심심함’보다 시간·돈·건강일 가능성이 더 크다
여가 통계가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장애요인은 따로 있다. 2025년 사회조사에서 여가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적 부담 48.7%, 시간 부족 21.9%, 체력이나 건강 문제 16.3% 순이었다. 10대는 절반 이상이 시간 부족을 이유로 들었고, 20대 이상은 경제적 부담을 가장 많이 꼽았다. 즉 사람들이 무료해서 문제라기보다, 하고 싶은 여가를 할 조건이 부족하다는 응답이 더 분명하게 잡힌다.
이 대목은 ‘권태사회’를 읽을 때 중요한 경계선이다. 동영상 시청 중심의 여가가 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내면의 공허나 권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비용이 적게 들고 접근이 쉬운 활동으로 여가가 쏠린 결과일 수도 있다. 반대로 삶의 만족도가 올랐다고 해서 반복적 디지털 소비가 낳는 지루함이나 관계 피로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결국 지금의 공식 통계로 확인되는 결론은 이 정도다. 첫째, 한국 사회에 ‘권태’를 직접 입증하는 단일 지표는 없다. 둘째, 여가시간 증가와 삶 만족도 상승만 보면 사회 전체가 더 권태로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셋째, 실제 여가는 동영상 시청과 휴식에 집중되고, 혼자 보내는 시간과 외로움은 늘고 있어 ‘권태사회’라는 해석이 붙을 만한 배경 신호는 존재한다. 넷째, 그 배경의 핵심 원인은 심리적 권태 자체라기보다 시간, 비용, 건강, 관계 구조의 변화일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AI 시대가 왔는데 왜 더 권태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답은 이렇다. 아직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권태의 확증’이 아니라, 여가의 디지털화와 고립의 증가, 그리고 원하는 여가와 실제 여가 사이의 벌어지는 간격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7’의 권태사회는 이 간격을 설명하려는 전망으로는 읽을 수 있지만, 이미 실증된 사회 현실로 단정하기에는 추가 검증이 더 필요하다.
자료: 연합뉴스, 김난도 “AI 필수 시대로…사람의 안목·흔적·실행력 중요”(2026-09-30); 통계청, 202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2025-07-28); 국가데이터처, 2025년 사회조사 결과(복지·사회참여·여가·소득과 소비·노동)(2025-11-11); 국가데이터처, 2024 한국의 사회지표(2025-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