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호황인데 내 지갑은 왜 그대로일까…경제 회복의 ‘시간차’
-1분기 GDP 3.8% 성장, 국내총소득은 13.2% 증가…수출 호황이 가계 소비와 내수로 번지기까지는 시차
한국 경제의 숫자는 좋아지고 있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3.8% 성장했고, 반도체 가격 상승에 따른 교역조건 개선까지 겹치면서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13.2% 증가했다. 생산보다 소득의 증가폭이 훨씬 컸다는 의미다. 한국은행도 이번 흐름을 반도체 경기 호조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이 느끼는 경기는 이 숫자만큼 빠르게 좋아지지 않는다. 수출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국가 전체의 구매력이 높아졌다고 해도 월급이나 자영업 매출이 곧바로 같은 폭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 경제는 좋아졌다는데 왜 내 생활은 그대로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경기 회복을 이해하려면 성장률 자체보다 수출에서 생긴 소득이 가계와 내수로 이동하는 과정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GDP 3.8%보다 눈에 띄는 숫자, 13.2%
올해 1분기 한국 경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숫자는 GDP보다 국내총소득 증가율이다.
한국은행의 잠정치에 따르면 1분기 실질 GDP는 전분기보다 1.8%, 전년 같은 기간보다 3.8% 증가했다. 동시에 실질 국민총소득(GNI)은 전년 동기 대비 13.2% 늘었다. 한국은행은 별도 분석에서 교역조건 개선을 반영하는 실질 국내총소득(GDI) 역시 13.2%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GDP는 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반면 GDI는 생산한 것을 해외와 거래했을 때 실제로 확보할 수 있는 구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반영한다.
쉽게 말하면 같은 양의 반도체를 수출하더라도 반도체 가격이 크게 오르고 우리가 수입하는 원유 같은 제품의 가격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작다면, 같은 생산으로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한국 경제에서 바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행은 대표 수출품인 반도체 가격 상승폭이 에너지 등 주요 수입품 가격 상승폭을 웃돌면서 교역조건이 크게 개선됐고, 이것이 GDP보다 훨씬 높은 GDI 증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가격 상승이 왜 ‘국가 소득’을 늘릴까
반도체 경기 회복은 단순히 수출액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반도체 가격이 오르면 같은 물량을 판매하고도 기업이 벌어들이는 돈이 많아진다. 수입가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면 그만큼 국내에 남는 실질 구매력도 커진다.
올해 1분기에는 이런 효과가 특히 컸다.
한국은행은 1분기 GDP 디플레이터가 전년 동기 대비 12.9% 상승했는데, 이를 국내 물가 급등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해석했다. 같은 기간 수출 디플레이터는 23.5% 오른 반면 내수 디플레이터는 2.1% 상승하는 데 그쳤다. 즉 국민이 체감하는 소비자물가가 폭등해서 명목경제 규모가 커진 것이 아니라, 수출기업의 교역 여건과 수익성이 개선된 측면이 컸다는 설명이다.
이는 한국 경제 입장에서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기업의 이익이 늘면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을 확대할 여력이 생기고, 법인세 증가를 통해 정부 재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기업이 채용과 임금을 늘리면 결국 가계소득과 소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이 연결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수출기업이 돈을 벌었다고 월급이 바로 오르지는 않는다
반도체 가격이 오른 순간과 가계가 그 효과를 느끼는 순간 사이에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우선 수출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개선돼야 한다. 기업은 늘어난 이익을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배당, 임금, 신규채용 등에 나눠 사용한다. 그 돈이 근로자와 협력업체, 주주에게 이동한 뒤 소비로 이어져야 비로소 음식점과 소매업, 서비스업 같은 내수업종도 경기 회복을 체감할 수 있다.
따라서 반도체 수출이 좋아졌다는 뉴스와 동네 상권의 매출이 좋아지는 시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도 이번 교역조건 개선이 가계 구매력과 기업 투자 여력을 높여 향후 내수 회복을 뒷받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이미 모든 가계가 경기 개선을 체감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거시경제 지표와 체감경기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반도체 호황의 혜택은 모든 업종에 똑같이 가지 않는다
시간차뿐 아니라 산업구조의 차이도 있다.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반도체 가격 상승은 전체 경제지표를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자체는 자본과 기술집약도가 매우 높은 산업이다.
공장과 장비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매출이 늘어난 만큼 고용이 똑같은 비율로 늘어나는 구조는 아니다.
반면 음식점이나 소매업, 숙박업, 개인서비스업처럼 생활과 밀접한 내수산업은 고용 비중은 크지만 반도체 수출 증가의 직접적인 혜택을 받기 어렵다.
대기업 실적이 먼저 좋아지고 그 효과가 협력업체와 근로자 소득, 소비를 거쳐 내수로 이동하기 때문에 업종별 체감경기의 격차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수출이 잘된다’와 ‘국민경제가 좋아진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수출 호황이 얼마나 폭넓은 소득 증가로 연결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과거와 다른 점은 ‘반도체 가격 상승’의 힘이다
한국은행이 이번 교역조건 개선을 별도로 분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 한국 경제에서 교역조건은 국제유가가 오르면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유와 원자재를 해외에서 대량으로 수입하는 경제구조 때문에 수입가격이 상승하면 같은 양을 수출해도 실제로 살 수 있는 수입품의 양이 줄어들었다.
이번에는 반대다.
한국의 핵심 수출품인 반도체 가격이 크게 상승하면서 수출가격 개선 효과가 수입가격 부담을 넘어섰다.
이 때문에 단순히 생산량이 증가한 것보다 국내경제가 얻은 실질적인 소득 증가폭이 훨씬 커졌다. 한국은행은 이런 GDI 증가가 장기간 이어질 경우 과거 교역조건 개선 때와는 다른 수준의 내수 파급효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보고 있다.
결국 이번 경기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가’뿐 아니라 ‘만든 것을 얼마나 좋은 가격에 팔았는가’에 있다.
기업이 번 돈이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해진다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늘어난 기업소득의 사용처다.
기업이 반도체 호황으로 확보한 자금을 국내 설비와 연구개발, 신규사업에 투자하면 관련 산업과 고용으로 효과가 확산될 수 있다. 임금과 성과급이 늘면 가계 소비에도 도움이 된다.
반면 이익이 기업 내부에 오래 머물거나 해외투자와 금융자산에 집중되면 국내 내수로 전달되는 속도는 느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수출 호황의 ‘낙수효과’를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사이의 생산성 격차를 줄이고, 중소 협력업체의 경쟁력을 높이며,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만들어진 소득이 국내 투자와 고용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반도체가 한국 경제 전체를 끌어올리는 힘은 반도체 기업의 이익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이익이 얼마나 넓은 경제영역으로 퍼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가계는 ‘성장률’보다 월급과 물가를 본다
거시경제와 체감경기가 어긋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경기상황을 판단하는 기준이 GDP와 다르기 때문이다.
가계가 보는 것은 월급이 얼마나 올랐는지, 장을 볼 때 얼마를 내는지, 대출이자는 얼마나 부담되는지, 일자리가 안정적인지다.
국가경제의 실질 구매력이 10% 이상 증가해도 자신의 임금이 거의 그대로이고 주거비와 식비 부담이 높다면 경기 개선을 체감하기 어렵다.
반대로 GDP 증가율이 높지 않더라도 임금이 오르고 고용이 안정되며 이자 부담이 줄어든다면 생활경기는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다.
따라서 ‘GDP가 올랐는데 왜 국민은 경기가 나쁘다고 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절반만 맞는 질문일 수 있다.
서로 다른 것을 측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황의 성패는 내수로 얼마나 번지느냐에 달렸다
현재 나타나는 반도체 중심의 경기 개선은 한국 경제에 분명 좋은 신호다.
1분기 실질 GDP가 3.8% 성장했고, 교역조건 개선으로 국내총소득이 훨씬 빠르게 늘었다는 것은 한국이 같은 생산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제적 자원이 커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숫자가 지속가능한 경기 회복을 의미하려면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기업이 늘어난 소득을 투자하고, 고용과 임금이 개선되고, 그 결과 가계 소비가 늘면서 서비스업과 자영업까지 회복해야 한다.
수출에서 시작된 호황이 내수로 연결돼야 비로소 국민이 느끼는 경기와 국가경제의 숫자가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경제를 볼 때는 반도체 수출액과 성장률만 확인해서는 부족하다. 기업 설비투자가 실제로 늘어나는지, 임금과 고용이 개선되는지, 민간소비가 얼마나 회복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반도체가 호황인데도 당장 내 지갑이 두꺼워지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제의 돈은 한 번에 모든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올해 한국 경제의 중요한 질문은 성장률이 몇 퍼센트인가보다, 반도체에서 시작된 소득 증가가 얼마나 빠르고 넓게 가계와 내수로 흘러가느냐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