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장소일까, 기억일까…서도호가 서울에 다시 세운 ‘이동하는 집’

사람은 집을 떠나도 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오래 살았던 방의 크기와 현관문의 손잡이, 계단의 높이와 복도의 폭은 기억 속에 남고, 다른 도시로 옮겨간 뒤에도 새로운 공간을 바라보는 기준이 된다.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과 영국으로 삶의 거처를 옮겨온 설치미술가 서도호는 지난 30여 년 동안 바로 이 기억을 실제 크기의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27일부터 2027년 2월 9일까지 서도호의 대규모 개인전 《서도호》를 연다. 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초기작부터 대표작,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까지 한자리에 모아 이주와 거주, 개인과 공동체, 공간과 기억, 정체성이라는 그의 오랜 질문을 다시 살펴본다.
전시장에는 서도호를 세계적으로 알린 천 소재의 건축 작업부터 집의 표면을 직접 떠내듯 기록한 ‘러빙/러빙’ 연작, 여러 도시에서 살았던 공간을 겹쳐놓은 작업, 개인과 집단의 경계를 묻는 초기작까지 이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오디오가이드 목록에는 ‘작은 문, 서울 성북구 성북동 260-10’, ‘러빙/러빙: 서울 집’, ‘러빙/러빙: 광주극장 사택’, 뉴욕 웨스트 22번가의 집을 기록한 작업,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 ‘다리 프로젝트’, ‘Who am we/바닥’, 2024년작 ‘둥지/들’ 등이 포함돼 있다.
익숙한 집을 그대로 복원하는 전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서도호가 실제로 묻는 것은 건축이 아니다. 사람이 어디에 속한다고 느끼는지, 장소를 떠난 뒤에도 이전의 공간이 어떻게 몸과 기억 안에 남는지, 그리고 세계 여러 도시를 이동하며 사는 시대에 ‘집’이라는 말이 여전히 하나의 고정된 주소를 뜻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벽과 문, 계단까지 천으로 다시 만드는 이유
서도호의 작업을 처음 보는 관람객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건축물의 크기와 재료 사이의 모순이다.
집과 복도, 계단, 문은 실제 건축물처럼 사람의 몸을 둘러쌀 만큼 크지만 재료는 대부분 반투명한 폴리에스터 천처럼 가볍다. 벽은 견고하게 사람을 막아서는 대신 건너편의 형체를 희미하게 보여주고, 문과 전등 스위치, 수도꼭지처럼 사소한 세부까지 섬세하게 재현되면서도 전체 공간은 언제든 접어 이동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방식은 서도호가 1990년대부터 발전시켜온 이른바 ‘패브릭 아키텍처’의 특징이다. LACMA는 그의 작업을 서울과 프로비던스, 베를린, 런던, 뉴욕 등 실제 거주했던 공간을 실물 크기의 천 구조물로 다시 만드는 작업으로 설명하며, 개인의 역사와 이주, 집과 정체성을 물리적 공간으로 전환한다고 소개한다.
건축물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다. 주소가 있고 땅에 고정돼 있으며,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 살다가 떠난다.
서도호는 이 관계를 뒤집는다.
집을 천으로 만들면 접을 수 있고, 가방이나 상자에 넣어 다른 도시로 가져갈 수도 있다. 사람이 이주하면 집도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셈이다. 물리적으로는 떠나온 공간이지만 기억 속에서는 계속 따라다니는 집을 재료의 성질로 구현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천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 단순히 아름답거나 동양적인 재료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거운 건축을 가볍게 만들고, 고정된 공간을 이동 가능한 공간으로 바꾸며, 실재하는 집과 기억 속 집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뉴욕 아파트가 미술관 안에서 ‘기억의 통로’가 됐다
서도호 작업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뉴욕의 주거공간을 재현한 연작이다.
LACMA가 소장한 ‘348 West 22nd Street, Apartment A, Unit-2, Staircase’는 작가가 실제로 살았던 뉴욕 건물의 복도와 계단, 방을 반투명 폴리에스터 천과 스테인리스 구조로 그대로 옮긴 작업이다. 방과 복도는 각기 다른 색으로 구성되고, 내부의 설비와 건축 세부까지 정밀하게 재현됐다. LACMA는 이 공간을 관람객이 작가의 개인사를 통과하는 일종의 통로로 설명한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도 뉴욕 웨스트 22번가 348번지의 집을 다룬 ‘러빙/러빙’ 작업이 소개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소가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뉴욕의 어느 집’이 아니라 거리명과 번지, 호수까지 남긴다. 기억은 추상적인 감정처럼 보이지만 서도호에게 기억은 손잡이의 모양이나 벽의 모서리, 계단의 각도처럼 구체적인 물질에 붙어 있다.
사람이 오래 살았던 집을 떠난 뒤 이상하게 특정 창문이나 현관의 냄새, 벽지의 색을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서도호의 집은 자전적인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관람객 자신의 기억을 끌어낸다. 작품 속 뉴욕 아파트에 살아본 적 없는 사람도 자신이 떠나온 집과 방을 떠올릴 수 있다.
집을 복제하는 대신 피부처럼 ‘문질러 기록’하기도 한다
‘러빙/러빙’ 작업은 집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건축공간의 표면을 종이나 다른 재료로 덮고 직접 문질러 벽과 문, 스위치, 손잡이 같은 물리적 흔적을 기록한다. 사진이 공간을 눈으로 포착한다면 러빙은 몸을 움직여 표면을 만지고 압력을 가하면서 공간을 기록한다.
이번 서울 전시에는 ‘러빙/러빙: 서울 집’, ‘러빙/러빙: 광주극장 사택’, 뉴욕 집을 대상으로 한 작업이 함께 소개된다.
이 방식에서는 집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몸과 접촉한 대상이 된다.
수년 동안 손으로 잡았던 문고리와 매일 지나던 문턱, 벽의 작은 요철까지 기록하면서 건축의 표면을 일종의 피부처럼 다룬다.
천으로 만든 집이 공간을 이동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면 러빙은 떠나기 전에 집의 흔적을 벗겨 보존하는 과정에 가깝다.
사람이 이사를 앞두고 빈방을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는 감정을 미술적인 기록방법으로 확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울·런던·뉴욕·베를린…여러 집이 하나의 ‘완벽한 집’이 된다
서도호에게 집은 하나의 원형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이라는 제목은 그의 작업이 어디까지 확장됐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람이 평생 한곳에서 산다면 집의 기억도 비교적 하나의 장소에 집중될 수 있다. 그러나 유학과 취업, 이민, 결혼 등의 이유로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는 현대인에게는 ‘내 집’이 여러 개 존재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집과 대학 시절의 방, 처음 독립했던 원룸, 다른 나라에서 살았던 아파트가 모두 자신을 구성한다.
서도호의 작품에서는 이런 공간들이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의 집을 기억하면서 뉴욕에 살 수 있고,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이전 집의 구조를 다시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완벽한 집’은 이상적인 주택 한 채를 뜻하기보다 한 사람이 거쳐온 여러 공간의 기억이 겹쳐진 상태에 가깝다.
세계화 시대의 정체성 역시 비슷하다.
어느 한 나라나 한 도시만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체성은 여러 장소와 언어, 관계가 겹쳐 만들어진다.
서도호의 ‘집’이 세계 미술관에서 계속 읽히는 이유
서도호는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여러 도시에서 활동해왔다.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2025년 런던 테이트모던, 2026년 LACMA 등 주요 미술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그를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미술가로 소개한다.
그의 작업이 해외에서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는 개인적인 이주 경험이 세계적인 변화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유학과 노동, 난민과 이민, 국제결혼, 주거비 상승과 도시재개발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계속 이동한다. 한 도시에서 태어나 같은 집에서 평생 사는 삶은 더 이상 보편적인 모델이라고 보기 어렵다.
동시에 사람들의 이동은 늘었지만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여권에 적힌 국적과 실제 생활하는 국가가 다를 수 있고, 가족이 사는 곳과 자신이 일하는 도시가 다를 수 있으며, 어린 시절 언어와 현재 사용하는 언어도 달라질 수 있다.
서도호의 집은 이런 시대의 감각을 건축으로 보여준다.
2025년 테이트모던에서도 질문은 ‘집을 어떻게 가지고 다닐 것인가’였다
런던 테이트모던은 2025년 ‘Do Ho Suh: Walk the House’를 열어 대규모 설치와 조각, 영상, 드로잉을 통해 집과 정체성, 이동을 조명했다. 테이트는 그의 작업을 건축과 공간, 몸, 기억의 관계를 살피면서 소속과 개인·집단의 문제를 묻는 예술로 소개했다.
전시 제목에 등장한 ‘Walk the House’라는 표현도 서도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상징적이다.
집은 보통 걷는 대상이 아니다. 집 안을 걸을 수는 있지만 집 자체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천 건축에서는 집이 사람을 따라 이동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건축물의 복제품이 아니라 이주하는 인간을 위한 기억의 장치다.
실제 집은 팔리거나 철거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있지만, 사람에게 남은 공간의 경험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둥지/들’은 한 채의 집에서 여러 집의 관계로 질문을 넓힌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주목할 작품 가운데 하나는 2024년작 ‘둥지/들’이다.
미술관이 공개한 작품정보에 따르면 이 작품은 폴리에스터 천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됐으며 길이가 21m를 넘는 대규모 설치다.
제목도 흥미롭다.
하나의 ‘둥지’가 아니라 복수형인 ‘둥지/들’이다.
이는 서도호의 관심이 한 개인의 어린 시절 집을 보존하는 문제에서 여러 사람이 각각 가지고 있는 집과 기억,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는 방향으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집은 사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구조다.
한 아파트 건물에는 수백 개의 사적인 집이 동시에 존재하고,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생활공간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된다.
개인의 기억을 탐구해온 서도호가 꾸준히 ‘개인과 공동체’를 함께 다뤄온 이유도 이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이번 전시를 설명하면서 이주와 거주뿐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그의 핵심 주제로 제시한다.
한 사람인가, 수많은 사람의 일부인가
서도호의 작업에는 집 외에도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묻는 작품이 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Who am we’와 ‘바닥’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서도호의 초기 작업에서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표면이나 구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많은 개인의 얼굴이나 작은 인물로 구성된 경우가 나타난다.
개인이 집단을 이루면서도 집단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문제다.
이 질문은 한국사회와도 깊게 맞닿아 있다.
작가는 한국에서 성장한 뒤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서로 다른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를 경험했고, 그 문제를 자신의 작업에서 반복해서 다뤄왔다.
집이라는 소재 역시 결국 같은 질문으로 연결된다.
집은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가족이나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장소이고, 아파트와 도시라는 더 큰 구조 안에서는 수많은 집 가운데 하나가 된다.
전통 바느질과 디지털 모델링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서도호의 천 건축은 손으로만 만들어진 공예도, 컴퓨터로 설계한 산업제품도 아니다.
LACMA는 뉴욕 웨스트 22번가 작업이 한국의 전통적인 봉제기술과 디지털 매핑 도구를 결합해 제작됐다고 설명한다.
실제 건축공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각 구조를 데이터로 전환한 뒤, 이를 다시 천의 패턴으로 제작하고 봉제해야 실물 크기의 집을 재현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많은 사람의 협업이 필요하다.
서도호의 작업에서 개인적인 기억을 다루면서도 제작 자체는 집단적인 노동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 개막 주간에 싱가포르의 판화·종이 전문 창작기관 STPI와 서도호의 협업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STPI는 전문 제작자와 예술가가 함께 작업하는 창작기관으로, 미술관은 이를 통해 서도호의 작품이 어떤 협업과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도 소개한다.
‘한국적인 작가’라는 말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서도호의 작품에는 서울의 한옥과 전통문, 한국에서 성장한 경험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LACMA 소장품 ‘Gate’는 서울에 있는 부모의 집 출입문을 실물 크기의 비단 구조물로 만든 작품이다.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친인 서세옥이 철거된 궁궐 건축의 목재를 활용해 전통적인 집을 지었고, 서도호는 그 공간의 문을 자신의 작업으로 다시 만들었다.
최근에는 경복궁 자경전을 천 건축으로 재해석한 2025년작도 LACMA에 소장됐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한국 전통건축을 소개하는 작업으로만 보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서울의 집과 뉴욕의 아파트, 런던의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에게 특정 건축양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공간과 맺은 관계다.
서울의 문도 기억이고 뉴욕의 계단도 기억이다. 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사람이 장소를 경험하고 떠난 뒤 기억하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이주와 이동을 경험한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다.
집값과 재개발의 시대, ‘사라지는 집’이라는 질문도 달라진다
2026년 서울에서 서도호의 작업을 보는 경험은 그가 처음 집을 소재로 작업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와도 다를 수 있다.
오늘날 집은 기억과 소속의 장소인 동시에 가장 큰 경제적 자산 가운데 하나다.
서울에서는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오래된 동네와 아파트가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이 올라간다. 청년층은 높은 주거비 때문에 여러 번 이사하고, 직장을 따라 지역을 옮기며, 장기간 같은 집에 머무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집을 실제 크기로 복제하고 표면을 하나씩 문질러 기록하는 서도호의 작업은 다른 의미를 얻는다.
집을 소유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별개로, 사람이 살았던 공간이 자신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건물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반대로 건물이 그대로 있어도 그곳을 떠난 사람에게는 이미 과거의 공간이 된다.
서도호의 집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사람이 느껴지는 이유
천으로 만든 서도호의 방과 복도에는 사람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문을 여는 위치와 계단의 높이, 스위치가 놓인 자리, 손이 닿았던 손잡이가 모두 인간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집은 비어 있어도 그곳에서 살았던 몸의 흔적은 남아 있다.
반투명한 천은 이런 감각을 더 강하게 만든다. 공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견고한 벽이 없고, 앞과 뒤가 동시에 보이며, 현실과 기억 사이에 놓인 장소처럼 느껴진다.
관람객은 작품을 바라보기보다 그 안을 지나가면서 자신의 몸으로 크기와 거리를 경험하게 된다.
회화 앞에서 한 걸음 떨어져 감상하는 것과 달리, 서도호의 건축에서는 관람객의 이동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