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사는 것보다 덜 기다리는 게 중요해졌다…요즘 소비자는 ‘시간’을 산다
마트에 직접 가면 배달비는 들지 않는다. 여러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하면 조금 더 싼 상품을 찾을 수도 있다. 맛집에 오래 줄을 서면 예약비를 아낄 수 있고, 여행 계획을 직접 짜면 별도의 서비스 비용도 필요 없다.
그런데 요즘 소비자는 꼭 가장 싼 방법만 고르지 않는다.
장을 보러 나가는 대신 한 시간 안에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수십 개 상품을 직접 비교하는 대신 AI에게 조건을 설명한 뒤 후보를 추려달라고 한다. 조금 더 비싸더라도 가까운 곳을 고르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를 찾는다.
사람들이 물건과 서비스에 지불하는 가격표에는 이제 상품값만 들어 있지 않다.
얼마나 덜 움직여도 되는지, 얼마나 덜 기다리는지, 얼마나 적게 찾아봐도 되는지까지 함께 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2026년 여름 국내 퀵커머스 이용 증가와 생성형 AI 검색 확산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장보러 가는 1시간을 배달로 바꾼 사람들
올여름 퀵커머스 시장에서는 변화가 눈에 띄었다.
GS더프레시의 2026년 상반기 퀵커머스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9% 증가했다. 2분기 전체 매출에서 퀵커머스가 차지한 비중도 9.9%까지 올라 분기 기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배민B마트에서도 가격을 낮춘 상품군의 주문 수가 지난해 9월과 비교해 올해 7월 약 62% 늘었다.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이 외출을 줄인 영향도 컸다. 하지만 이용 방식 자체를 보면 퀵커머스의 경쟁력이 단순히 ‘빠른 배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선식품과 생필품을 주문한 뒤 15분에서 1시간 안팎에 받을 수 있고, 여러 플랫폼에서 가격을 비교한 뒤 집에서 결제를 끝낼 수 있다. 마트까지 이동하고 상품을 찾고 계산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한꺼번에 줄여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배송이 온라인 쇼핑에 딸려오는 부가서비스에 가까웠다면, 퀵커머스에서는 배송 속도 자체가 상품의 일부가 됐다.
우유가 떨어졌거나 저녁에 필요한 채소가 없을 때 소비자가 사는 것은 우유와 채소만이 아니다.
마트를 오가는 데 들어갈 시간까지 함께 사고 있는 셈이다.
가격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싸고 빠른 것’을 찾는다
그렇다고 소비자가 가격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가격 비교는 더 꼼꼼해지고 있다.
2026년 7월 한국은행 소비자동향조사에서 소비지출전망지수는 110을 기록했지만, 소비자가 체감하는 물가 상승에 영향을 준 품목으로 석유류와 농축수산물, 공공요금 등이 계속 꼽혔다.
퀵커머스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배민B마트의 할인 상품 주문 증가나 유통업체들이 빠른 배송과 할인 행사를 함께 강화하는 것은 소비자가 단순히 ‘빠르기만 하면 비싸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달라진 것은 계산 방식이다.
상품가격 1000원을 아끼기 위해 왕복 40분을 써야 한다면 그 40분도 비용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 소비에서는 ‘최저가’보다 ‘충분히 싼 가격에 시간을 덜 쓰는 선택’이 경쟁력을 갖게 된다.
가격과 시간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비용을 함께 계산하는 소비다.
쇼핑에서 가장 피곤한 것은 결제가 아니라 ‘고르는 시간’
시간을 줄이려는 소비는 배송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상품을 찾고 비교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26년 8월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상품과 최저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피로를 느낀다고 답했다.
AI 쇼핑 에이전트를 이용해본 사람은 54.2%였고 20대에서는 63.5%까지 올라갔다. 앞으로 이용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78.4%였다.
특히 소비자가 관심을 보인 기능은 최저가와 리뷰, 제품 사양처럼 직접 찾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드는 정보를 대신 비교해주는 기능이었다.
흥미로운 점도 있다.
소비자의 74%는 검색과 비교에는 AI를 활용할 수 있지만 마지막 구매 결정은 직접 하고 싶다고 답했다.
시간은 줄이고 싶지만 선택권까지 넘기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시간을 사는 소비’가 반드시 모든 일을 대신 맡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귀찮고 반복적인 과정은 줄이고, 중요한 결정에는 여전히 직접 개입하려는 모습에 가깝다.
검색창 여러 번 열던 시간을 AI 한 번으로 줄인다
생성형 AI 확산에서도 시간 절약은 중요한 이용 이유로 나타난다.
2026년 5월 발표된 정부 조사에서 국내 생성형 AI 이용 경험자는 38.9%였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정보 검색의 효율성’이 86.0%로 가장 많이 꼽혔다.
AI에게 질문하는 목적이 새로운 기술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정보를 더 빨리 찾기 위한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구매 과정에서도 변화가 더 뚜렷해졌다.
구글이 공개한 한국 소비자 조사에서는 AI나 AI 기반 검색을 사용하는 소비자 가운데 74%가 구매 결정을 더 빨리 내린다고 답했다. 여러 검색어를 바꾸고 후기와 가격을 각각 찾아보던 과정을 한 번의 대화로 줄이는 방식이다.
프레인글로벌과 한국PR학회의 2026년 8월 조사에서는 최근 3개월 사이 생성형 AI가 추천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실제 구매해본 사람이 49.9%로 나타났다.
다만 71.1%는 AI가 내놓은 답을 다시 인터넷에서 확인한다고 답했다.
검색시간을 줄이고 싶어 AI를 이용하지만, 잘못된 선택에 드는 비용까지 감수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기다리지 않는 것’도 상품이 됐다
시간을 아껴주는 서비스의 공통점은 이전에는 소비자가 직접 부담했던 과정을 기업이 대신 가져간다는 데 있다.
음식배달은 식당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가져간다.
퀵커머스는 장보기 시간을 가져간다.
예약 서비스는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인다.
AI 검색은 여러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정보를 비교하는 시간을 줄인다.
이런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기업이 파는 것도 달라졌다.
상품이나 음식만 잘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문부터 결제, 배송, 문의까지 얼마나 적은 단계를 거치게 하느냐가 경쟁력이 된다.
소비자는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파느냐’뿐 아니라 ‘내 시간을 얼마나 쓰게 만드느냐’를 서비스 품질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앱을 여러 번 눌러야 하는 것, 매번 주소를 다시 입력하는 것, 긴 전화 연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예전에는 작은 불편으로 여겼던 과정도 서비스 선택을 바꾸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람에게 하루 24시간은 늘어나지 않았다
시간에 대한 소비자의 민감도가 높아지는 배경에는 하루의 구조도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생활시간조사를 보면 10세 이상 국민은 하루 평균 11시간32분을 수면과 식사 같은 필수생활에 쓰고, 일과 가사·이동·학습 등 의무생활에는 7시간20분을 사용했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은 평균 5시간6분이었다.
그중 미디어 이용이 2시간43분을 차지했다.
사람마다 생활은 다르지만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조건은 같다.
배달과 예약, AI 같은 서비스가 줄여주는 10분이나 30분이 개인에게는 생각보다 큰 가치가 될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출퇴근과 돌봄, 가사 시간이 긴 사람이라면 직접 장을 보거나 여러 상품을 찾아보는 일을 줄이는 것이 단순한 편리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시간 절약에도 가격이 붙으면서 새로운 격차도 생긴다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서비스가 많아질수록 다른 문제도 생긴다.
시간을 절약할 여유 역시 돈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배달비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을 보러 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유료 AI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료 조사와 문서 작성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비용을 내는 예약 서비스가 있다면 대기시간을 피할 수도 있다.
컨슈머인사이트가 2026년 조사한 생성형 AI 이용행태에서도 유료 이용자는 하루 평균 130분을 사용해 전체 활성 이용자의 77분보다 이용시간이 길었다. 업무나 생산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는 비율도 유료 이용자에서 더 높았다.
편리한 서비스가 확대될수록 시간 절약이 새로운 소비 혜택이 되는 동시에, 누가 그 혜택을 더 많이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생길 수 있다.
가격이 싼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과 시간을 아끼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사이에서 사람마다 선택지가 달라지는 것이다.
‘싸게 샀다’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 소비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기준은 가격이었다.
같은 물건을 1만원보다 9000원에 샀다면 1000원을 아꼈다고 계산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에서는 계산하지 않는 비용이 하나 더 있다.
그 물건을 사기 위해 얼마나 이동했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몇 개의 앱과 사이트를 뒤졌는지다.
직접 마트에 가면 배송료는 아낄 수 있지만 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여러 사이트를 일일이 비교하면 최저가를 찾을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검색시간도 늘어난다.
반대로 배달비나 서비스 비용을 조금 더 내고 그 시간을 다른 일에 쓴다면 소비자는 그 차액을 ‘시간의 가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시간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가격보다 시간이 더 중요해졌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2026년 소비시장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조금 더 복합적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격을 비교한다. 동시에 그 가격을 아끼기 위해 내가 써야 할 시간도 계산한다.
퀵커머스가 가격 경쟁을 강화하고, AI가 최저가와 리뷰를 대신 비교하는 서비스로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싼 것’을 찾는 소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포함해 무엇이 가장 덜 비싼가’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