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지질시대로 채택되지 못한 인류세, 인간이 지구를 바꿨다는 증거까지 부정된 것은 아니다
인류세가 국제 지질시대 표준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지구를 바꿨다는 과학적 증거가 기각됐다는 뜻은 아니다. 2024년 3월 국제층서위원회 산하 제4기층서소위원회는 인류세를 홀로세 뒤의 새 공식 지질시대로 넣는 안을 승인하지 않았고, 국제층서위원회와 국제지질과학연맹도 같은 달 그 결과를 승인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인간 영향의 존재 자체보다, 그 영향을 지질시대표의 공식 단위로 어디까지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관한 층서학적 판단과 분류 문제에 더 가까웠다.
이 점은 현재의 공식 지질시대표에서도 확인된다. 국제층서위원회가 2026년 6월 업데이트한 국제 연대표에는 여전히 현시점을 홀로세 에포크의 메갈라야기 안에 둔다. 즉 공식 명칭으로서의 인류세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인간 활동이 기후·생물권·퇴적물·화학 조성에 광범위한 흔적을 남겼다는 연구와 관측이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결된 것은 ‘인류 영향’이 아니라 ‘공식 단위화’였다
국제층서위원회의 인류세 작업반은 인류세를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공식 지질시대 단위로 만들기 위해, 특정 지층 경계와 기준점을 정하는 절차를 밟아 왔다. 작업반이 2023년 제출한 공식 제안은 캐나다 크로퍼드호 퇴적층을 기준 단면으로 삼고, 1952년 무렵 플루토늄 증가 신호를 대표 지표로 제시해 인류세의 시작을 20세기 중반 ‘대가속기’와 연결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위원회 표결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국제층서위원회 자료를 보면, 핵심 쟁점은 인간 영향이 실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에포크로 고정된 하한 경계와 함께 정의하는 방식이 적절한지, 그리고 그 경계가 전 지구적으로 가장 타당한 층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였다. 국제층서위원회와 국제지질과학연맹의 공동 성명도 인류세가 공식 단위로는 거부됐지만 지구시스템에 대한 인간 영향을 설명하는 용어로는 계속 쓰일 것이라고 분명히 적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지질시대표의 공식 단위는 대중적 설득력만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지층에 남는 신호의 동시성, 경계의 재현 가능성, 다른 지역 기록과의 상관 가능성, 기존 연대표와의 정합성 같은 엄격한 층서학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인류세 논쟁은 인간 영향의 크기를 둘러싼 찬반이 아니라, 그 영향을 어떤 지질학 언어로 제도화할 것인가를 둘러싼 명칭 논쟁의 성격이 강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구를 바꿨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공식 채택 실패와 별개로, 인간 활동이 지구시스템을 바꿨다는 증거는 여러 연구 축에서 축적돼 있다. 국제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는 2021년 6차 평가보고서에서 최근 기후 변화에 대한 인간 영향의 증거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정리했다. 같은 보고서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증가 속도가 적어도 지난 80만 년의 어떤 시기보다 훨씬 빠르다고 평가했고, 해양과 육상 생태계, 해수면, 극한현상 변화까지 인간 배출과 연결되는 관측과 모형 근거를 종합했다.
층서학 쪽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제시돼 왔다. 2016년 사이언스에 실린 종설은 인간 활동이 남긴 기능적·층서학적 표지가 홀로세와 구별될 정도로 결합돼 있다고 정리했다. 토지 이용 변화,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같은 새로운 물질의 확산, 질소·인 순환 교란, 화석연료 연소와 핵실험에서 비롯된 전 지구적 신호가 함께 남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세 작업반 홈페이지 역시 침식과 퇴적 이동 증가, 탄소·질소·인 순환 교란, 지구온난화·해수면 상승·해양 산성화, 생물권 급변, 플라스틱과 콘크리트 같은 ‘기술화석’의 확산을 대표 현상으로 열거한다.
최근에는 2024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연구가 전 세계 지질 아카이브에서 인위적 흔적이 20세기 중반 급증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이 연구는 인류세 공식화의 찬반과 별개로, 인간 흔적이 서로 다른 기록물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화하는 자료로 읽힌다. 다만 이런 결과가 곧바로 ‘새 에포크의 공식 승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증거의 존재와 분류 체계의 채택은 같은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일부 연구자들은 ‘인류세 에포크’ 대신 다른 틀을 말하나
인류세를 공식 에포크로 만들자는 입장에 반대한 연구자들 가운데는 인간 영향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격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일부 연구자들은 인류세를 고정된 시작점을 가진 에포크보다, 지역마다 시작 시점이 어긋나고 지금도 진행 중인 ‘사건’ 또는 ‘이벤트’로 보는 편이 층서학적으로 더 맞다고 주장한다.
2023년과 2024년에 나온 관련 논문들은 농경 확산, 식생 변화, 퇴적 구조 변화, 산업화, 핵실험 신호가 모두 하나의 연도에 깔끔하게 맞물리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런 견해는 인간이 지구를 바꿨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변화가 너무 복합적이고 비동시적이어서, 기존 지질시대 구분법의 한 칸에 넣는 데 무리가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반대로 공식화를 지지한 쪽은 바로 그 복합적 변화 가운데서도 20세기 중반의 전 지구적 동시성과 뚜렷한 지층 신호가 충분히 강하다고 본다. 크로퍼드호 제안과 플루토늄 표지는 이런 논리를 대표한다. 결국 이번 논쟁의 핵심은 인간 영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신호를 국제 표준의 경계로 삼을 만큼 충분히 명료하다고 볼 수 있느냐에 있었다.
독자가 구분해서 봐야 할 두 문장
따라서 독자는 서로 다른 두 문장을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 ‘인류세는 아직 공식 지질시대가 아니다’는 문장은 현재의 국제 지질 연대표에 관한 사실이다. 둘째, ‘인간 활동이 지구시스템을 크게 바꾸고 있다’는 문장은 기후, 생지화학 순환, 생물권, 퇴적 기록에 대한 축적된 관측과 연구의 결론이다.
첫 문장이 참이라고 해서 둘째 문장이 자동으로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이번 부결은 과학적 증거 전체의 철회가 아니라, 그 증거를 국제 층서 표준의 이름으로 제도화하는 문제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인류세 논쟁은 ‘인간이 지구를 바꿨는가’보다 ‘그 변화를 공식 지질시대로 부를 것인가’에 더 가까운 논쟁이었다.
자료: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Working Group on the ‘Anthropocene’(2024 확인본);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Joint statement by the IUGS and ICS on the vote by the ICS Subcommission on Quaternary Stratigraphy(2024);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International Chronostratigraphic Chart v2026/06(2026);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Annual Report 2024 Appendix 1(2024); IPCC, Climate Change 2021: The Physical Science Basis, Chapter 3 and Chapter 5(2021); Waters et al., The Anthropocene is functionally and stratigraphically distinct from the Holocene(Science, 2016); Kuwae et al., Toward defining the Anthropocene onset using a rapid increase in anthropogenic fingerprints in global geological archives(PNAS, 2024); Edgeworth et al., The stratigraphic basis of the Anthropocene Event(Quaternary Science Advances,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