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는 공식 지질시대가 아니다…그렇다고 정치적 은유만도 아닌 이유
인류세는 2026년 10월 현재 국제 지질시대 구분표에 오른 공식 지질시대가 아니다. 2024년 국제층서위원회와 국제지질과학연맹은 인류세를 새로운 세·에포크로 편입하자는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결정이 인류세라는 말을 과학 바깥의 정치적 수사로 밀어낸 것은 아니다. 현재 논쟁의 핵심은 인간이 지구를 크게 바꿨느냐가 아니라, 그 변화를 지층 경계로 공식 표준화할 수 있느냐, 또 그렇게 표준화하는 것이 다른 학문들에도 가장 유용한 정의냐에 있다.
이 때문에 인류세를 둘러싼 다툼은 사실상 두 질문이 겹친 상태로 전개돼 왔다. 하나는 지질학의 질문이다. 지층과 암석, 퇴적물에 남은 전 지구적이고 동시적인 표지를 근거로 새로운 시대를 선언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지구시스템과학과 사회과학의 질문이다. 인간 활동이 기후, 생물권, 물질순환, 경제와 정치까지 얽힌 행성 규모의 변화를 만들었을 때 이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은 무엇인가.
지질학자들이 본 쟁점은 ‘인간 영향’이 아니라 ‘지층 경계’였다
국제층서위원회 체계에서 새로운 지질시대를 공식화하려면 이름이 널리 쓰인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준이 되는 지층 단면과 경계점, 이른바 GSSP가 필요하고, 그 경계가 세계 여러 지역의 지층에서 상관 가능해야 하며 장기적으로 보존될 만한 층서 신호를 가져야 한다. 인류세 작업반은 이런 기준에 맞춰 인류세를 홀로세 다음의 새로운 세·에포크로 올리자는 제안을 준비했다.
작업반이 2023년 말 제출한 공식 제안의 핵심은 시작 시점을 1952년으로 두는 것이었다. 캐나다 크로퍼드호의 연간 퇴적층에서 확인되는 플루토늄 증가를 주된 표지로 삼고, 이를 20세기 중반의 ‘대가속’과 연결해 인간 활동이 남긴 전 지구적 층서 신호를 공식 경계로 채택하자는 구상이었다. 작업반 내부 투표에서는 인류세를 공식 층서 단위로 다루자는 안과, 중반 20세기 신호를 경계의 주된 안내표지로 삼자는 안이 모두 29대 4로 통과됐다.
하지만 심사 권한을 가진 국제층서위원회 산하 제4기층서소위원회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국제지질과학연맹과 국제층서위원회의 2024년 3월 성명에 따르면, 소위원회 투표 결과는 찬성 4, 반대 12, 기권 3이었다. 이 결정은 이후 국제층서위원회 집행부와 산하 분과위원장들의 지지를 받아 확정됐다. 공식 결론은 분명했다. 인류세는 유용한 개념일 수는 있어도 지질시대표의 정식 항목으로는 채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 논리의 핵심은 ‘너무 이르다’와 ‘너무 한 점에 묶였다’였다
반대 측 논리는 인간 영향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지구 환경에 거대한 흔적을 남겼다는 점은 폭넓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단일한 지질시대 경계로 압축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국제지질과학연맹의 확대 성명은 인간의 영향이 농경의 확산, 아메리카 식민화, 산업혁명 등 중반 20세기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누적돼 왔고, 그 전개가 지역마다 시간차를 보인다고 정리했다.
이 문제는 지질학의 전문 용어로 말하면 ‘동시성’과 ‘비동시성’의 충돌이다. 공식 시대 경계는 가능한 한 하나의 시점으로 정밀하게 묶여야 한다. 반면 인간의 토지 이용, 생태계 교란, 탄소 배출, 종 멸종, 도시화는 수천 년에 걸쳐 퍼져 나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일부 지질학자와 고고학자, 환경사 연구자들은 인류세를 홀로세를 끝내는 새 에포크보다,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는 ‘지질학적 사건’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 입장은 2022년 논문들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정리됐다. 이들 논문은 인류세를 고정된 시작점이 있는 공식 에포크로 두면 인간 영향의 공간적·시간적 이질성이 잘리지 않고 남는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대신 지구 역사에서 다른 대변환 사건들처럼, 아직 진행 중이며 지역별로 다른 속도로 전개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편이 지질학과 환경사, 사회과학 모두에 더 실용적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지구시스템 연구자들에게 인류세는 무엇인가
반대로 인류세를 지지해 온 연구자들은 지층 표준화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들에게 인류세는 인간이 기후, 생물지구화학 순환, 생물다양성, 하천과 해안, 물질 생산과 폐기물 축적까지 한꺼번에 바꾼 행성 규모 전환을 가리키는 과학 개념이다. 2020년 연구에서는 인구, 에너지 사용, 생산성, 플라스틱·시멘트·비료 생산, 대기 중 온실가스, 대형 댐과 같은 지표들이 20세기 중반 이후 강하게 결합해 움직이며 홀로세 상태에서 벗어나는 전환을 뒷받침한다고 제시했다.
이 관점은 층서학보다 넓은 지구시스템과학의 언어에 가깝다. 최근 과학사 연구도 인류세 개념이 처음부터 지질학만의 산물이 아니었다고 본다. 2000년 폴 크뤼천과 유진 스토어머가 이 용어를 널리 알린 뒤, 이 개념은 지구를 물리·화학·생물·인간 시스템이 결합된 하나의 체계로 보는 연구 틀 속에서 빠르게 확장됐다. 다시 말해 인류세는 지층 표준화 논쟁과 별개로, 인간이 더 이상 단순한 환경의 이용자가 아니라 지구시스템의 작동 자체를 바꾸는 행위자라는 진단을 담고 있다.
그래서 국제층서위원회가 인류세를 기각한 뒤에도 같은 기관 성명은 이 용어가 지구·환경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정치, 경제, 일반 대중에게 계속 쓰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공식 지질시대 지위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과, 과학적·사회적 설명 개념으로서의 효용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은유’라는 규정도 절반만 맞다
인류세를 정치적 은유라고 부르는 쪽은 대체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인류’라는 한 단어가 실제로는 국가, 계급, 산업, 식민주의, 에너지 체제의 책임 차이를 흐릴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행성 규모의 하나의 서사를 앞세우면 역사적 불평등과 지역별 경험이 지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비판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오래 제기돼 왔고, 지구시스템과학의 거시적 서사가 놓치는 사각지대를 드러낸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그렇다고 인류세를 단지 정치적 수사로만 돌려세우는 것도 사실을 단순화한다. 과학사와 사회과학 쪽 최근 논의는 오히려 인류세가 지질학과 지구시스템과학, 역사학과 사회과학이 서로 다른 질문을 같은 단어에 실어온 결과라고 본다. 한쪽에서는 지층 경계의 형식적 타당성을 묻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 활동이 행성 조건을 바꿨다는 실질적 전환을 설명하려 한다. 같은 말이지만 측정 대상과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생긴 것이다.
결국 인류세는 분야에 따라 지위가 다르다. 층서학에서는 현재 비공식 용어다. 지구시스템과학에서는 여전히 강한 설명력을 가진 연구 개념이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는 과학 개념을 넘어서 책임, 불평등, 기술, 통치, 역사 서사를 따지는 분석 틀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학 개념이냐 정치적 은유냐’라는 이분법보다는, 어떤 학문이 어떤 증거 기준으로 그 말을 쓰고 있는지 먼저 구분하는 편이 실제 논쟁에 더 가깝다.
인류세 논쟁이 남긴 가장 분명한 결론도 여기에 있다. 지질학의 공식 표준화 절차는 인류세를 아직 새 시대라고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홀로세의 배경 조건을 흔들 만큼 지구 시스템에 깊이 개입했다는 문제의식까지 기각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논쟁은 인간 영향의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찬반이 아니라, 그 영향을 어떤 시간 단위와 어떤 학문 언어로 정의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학제 간 충돌에 가깝다.
자료: 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Joint statement by the IUGS and ICS on the vote by the ICS Subcommission on Quaternary Stratigraphy(2024); International Union of Geological Sciences, The Anthropocene: IUGS-ICS Statement(2024-03-20); Subcommission on Quaternary Stratigraphy, Working Group on the ‘Anthropocene’ 웹페이지 및 Anthropocene Working Group formal proposal 안내(확인일 2026-10-16); Zalasiewicz, Waters, Head, Anthropocene: its stratigraphic basis(Nature, 2017); Syvitski 외, Extraordinary human energy consumption and resultant geological impacts beginning around 1950 CE initiated the proposed Anthropocene Epoch(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 2020); Gibbard 외, The Anthropocene as an Event, not an Epoch(Journal of Quaternary Science, 2022); Simon and Thomas, Earth System Science, Anthropocene Historiography, and Three Forms of Human Agency(Isis, 2022); Nature Reviews Earth & Environment, The Anthropocene debate(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