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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고성만 세계유산인 시대는 끝났다…부산서 바뀐 ‘인류의 유산’ 지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하면 흔히 유럽의 오래된 성과 성당, 왕궁이나 고대 유적을 떠올리기 쉽다. 실제 세계유산 제도는 오랫동안 유럽과 유명 기념건축물에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이 쏠렸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아프리카와 작은 섬나라, 식민지 경험과 강제이주를 품은 장소, 살아 있는 공동체의 문화경관은 충분히 대표되지 못한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 지도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이번 회의에서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유산 19곳, 자연유산 5곳, 복합유산 1곳 등 모두 25곳을 새롭게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이로써 세계유산은 173개국 1273곳으로 늘었다. 기존 세계유산 2곳의 경계 확대도 승인됐는데, 개최국인 한국에서는 ‘한국의 갯벌’ 2단계가 포함됐다.

숫자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새롭게 세계유산 보유국이 된 나라들이다. 아프리카의 코모로와 상투메프린시페, 남수단은 이번 부산 회의에서 자국 최초의 세계유산을 갖게 됐다. 코모로와 상투메프린시페는 작은 섬나라이고, 남수단은 2011년 독립한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 가운데 하나다. 1972년 세계유산협약 가입국이 196개국에 이를 정도로 제도가 세계적으로 확산됐지만, 부산 회의 직전까지도 26개 협약 당사국에는 세계유산이 한 곳도 없었다. 이번 등재로 그 숫자는 23개국으로 줄었다.

부산에서 바뀐 것은 ‘유명한 장소의 목록’만이 아니었다.

전쟁과 식민지배, 강제이주, 기후위기, 생태계 이동처럼 인류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장소를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세계유산의 기준 자체가 넓어지고 있다는 흐름이 더욱 선명해졌다.


남수단의 첫 세계유산은 궁전이 아니라 ‘동물의 이동 경로’였다


남수단이 처음 세계유산 목록에 올린 곳은 왕궁이나 고대도시가 아니다.

‘보마-바딩길로 이동경관(Boma–Badingilo Migratory Landscape)’이라는 거대한 자연지역이다.

남수단 동부와 중부에 걸쳐 펼쳐진 이 지역에서는 흰귀코브와 티앙, 몽갈라가젤을 비롯한 대형 초식동물이 계절에 따라 대규모로 이동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 광범위한 생태계와 동물 이동 현상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자연적 가치를 갖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남수단의 첫 세계유산은 등재와 동시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도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세계유산 등재는 축하할 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곳의 경우에는 보호 필요성이 너무 긴급해 세계유산과 위험유산 지정을 동시에 받은 것이다.

유네스코는 올해 부산 회의에서 남수단의 보마-바딩길로 이동경관을 비롯해 레바논의 마운트 아멜 성채, 팔레스타인의 세바스티아 등 세 곳을 긴급절차로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세 곳 모두 동시에 위험유산 목록에도 올랐다. 분쟁이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유산의 가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만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일반적인 절차를 밟기보다 국제적 보호체계 안으로 빠르게 편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세계유산 등재가 관광 홍보를 위한 ‘인증마크’가 아니라 보호를 위한 국제적 개입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코모로가 올린 것은 왕조의 흔적이 남은 ‘메디나’였다


코모로는 인도양 서부, 아프리카 동쪽과 마다가스카르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이번 부산 회의에서 코모로는 ‘코모로 역사 술탄국의 메디나’를 자국 최초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여러 섬에 남아 있는 역사도시와 술탄국의 흔적은 인도양 해상교역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랍권, 페르시아와 남아시아의 문화가 만났던 역사를 보여준다.

세계유산 지도를 보면 이런 인도양 섬나라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희미했다.

유럽에는 세계유산이 수십 곳씩 있는 국가가 적지 않은 반면, 작은 섬개도국 가운데에는 협약에 가입하고도 오랫동안 단 한 곳도 등재시키지 못한 국가가 있었다. 유산의 가치가 없어서라기보다 후보지를 조사하고 경계를 설정하고 보존계획과 법적 보호체계를 만들며 방대한 신청서를 준비할 행정·재정·전문 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코모로의 첫 등재가 유네스코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것도 이런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

유네스코는 이번 세 나라의 첫 등재를 세계유산 목록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Priority Africa’ 정책의 성과로 설명했다. 2021년 아프리카 세계유산 전략을 채택할 당시 세계유산을 한 곳도 갖지 못한 아프리카 국가는 12개국이었는데, 5년 만에 그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상투메프린시페가 세계유산으로 남긴 것은 식민지 농장의 역사였다


상투메프린시페의 첫 세계유산 역시 전통적인 왕궁이나 성채와는 성격이 다르다.

‘상투메프린시페의 로사스: 식민 농업 시스템과 강제이주’가 그 대상이다.

로사스(Roças)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기에 운영된 대규모 플랜테이션 체계다. 카카오와 커피 등의 생산을 위해 만들어졌고 아프리카 각지에서 이동한 노동자들의 삶과 식민지 농업경제의 구조가 건축과 토지 이용, 정착지 형태에 남아 있다. 유네스코는 이를 단순한 농장시설이 아니라 식민지 농업 시스템과 강제이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평가했다.

여기에는 세계유산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다.

과거에는 화려한 건축과 고대 문명, 왕과 종교권력이 남긴 기념물이 세계유산의 대표적인 이미지였다면 최근에는 반드시 자랑스럽거나 아름다운 역사만 보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식민지배와 노예제, 강제노동, 전쟁처럼 인류가 기억해야 할 어두운 역사 역시 장소에 남아 있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유산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 목록’과 다른 이유다.


노르망디 상륙 해변도 이제 세계유산…‘기억의 장소’가 늘어난다


이번 부산 회의에서는 프랑스의 ‘1944년 노르망디 D-데이 상륙 해변’도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나치 독일이 점령한 서유럽에 상륙한 장소들로,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공간이다. 유네스코는 이를 2023년부터 세계유산 체계 안에서 본격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기억의 장소(sites of memory)’ 흐름의 연장선에서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래됐느냐가 아니다.

노르망디 상륙은 20세기 사건이고, 수천 년 된 고대도시와 비교하면 역사적 시간도 짧다. 그러나 세계유산의 판단 기준은 건축물의 연대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유할 만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갖느냐에 있다.

전쟁과 학살, 억압을 기억하는 장소를 세계유산으로 인정하는 흐름은 유산의 개념을 넓힌다.

보존해야 하는 것은 승리한 문명이 세운 화려한 건축물뿐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핀란드 알토 건축도 등재…세계유산은 고대 건축에만 머물지 않는다


근현대 건축도 세계유산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건축가 알바 알토와 그의 협력자들이 설계한 13개 건축물과 건축군이 ‘알토 작품군(Aalto Works)’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재됐다. 1928년부터 1988년 사이 만들어진 공공·주거·공동체 건축으로, 20세기 모더니즘을 지역적 전통과 인간 중심적 설계로 풀어낸 점이 인정됐다.

세계유산이라고 해서 수백 년 이상 된 건축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20세기 산업과 도시계획, 근대건축도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주고 충분한 보존가치를 갖는다면 세계유산 후보가 될 수 있다.

이는 문화재의 기준이 ‘얼마나 오래됐는가’에서 ‘인류사의 중요한 변화를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학교와 공공청사, 공장과 교통시설 가운데 일부 역시 시간이 지나면 특정 시대의 생활과 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세계유산의 가장 오래된 고민은 ‘유럽 편중’이었다


1972년 세계유산협약이 만들어진 뒤 세계유산 목록은 빠르게 늘었다.

하지만 제도가 성장할수록 지역적 불균형도 분명해졌다.

유럽은 로마시대 유적과 중세도시, 성당과 수도원, 왕궁처럼 이미 학술조사와 보존제도가 잘 갖춰진 유산이 많았고, 각국 정부도 후보 신청을 준비할 전문조직과 재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 독립국가로서 문화재 관리체계를 뒤늦게 구축한 아프리카 국가나 작은 섬나라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세계유산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유산의 가치만 주장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정확한 경계와 완충구역을 설정하고, 법적 보호체계를 제시하며, 장기 관리계획과 보존상태, 지역 주민 참여 방안까지 갖춰야 한다. 자연유산이라면 생태학적 자료와 종 보전계획도 필요하다.

이 과정에는 상당한 전문인력과 비용이 든다.

결국 세계유산 목록이 문화적 가치의 차이뿐 아니라 국가별 행정능력의 차이까지 반영할 수 있다는 문제가 생겼다.

유네스코가 아프리카와 작은 섬개도국을 대상으로 별도의 지원전략을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산에서 ‘작은 섬나라 전략’까지 새로 만든 이유


이번 부산 회의에서 25개 신규 세계유산만큼 중요한 결정 가운데 하나는 ‘세계유산을 위한 작은 섬개도국 전략 2026~2034’의 채택이다.

유네스코는 이 전략에 1300만달러 규모의 예산을 배정하고 작은 섬개도국이 세계유산 후보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역량을 높이는 한편,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작은 섬나라는 세계유산 제도의 불균형과 기후위기가 동시에 만나는 지역이다.

문화적으로 독특한 전통과 생태계를 갖고 있어도 전문인력이 부족해 세계유산 신청 자체가 어렵고, 어렵게 등재돼도 해수면 상승과 해안침식, 강한 열대폭풍과 산호초 훼손으로 유산이 사라질 위험이 크다.

따라서 ‘목록에 한 곳 더 넣어주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등재 준비부터 이후 관리와 기후적응까지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판단이 전략에 반영됐다.

부산 회의 이후에도 아직 23개 세계유산협약 당사국에는 등재 유산이 하나도 없다. 유네스코가 이들 국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도 세계유산 지도의 공백을 줄이는 것이 현재 제도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임을 보여준다.


25곳 새로 넣었지만 더 많은 시간을 쓴 건 ‘이미 있는 유산을 어떻게 지킬까’였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신규 등재만 결정하는 회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등재된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지를 감독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부산 회의를 앞두고 유네스코는 신규 후보 30곳과 기존 세계유산의 변경 제안 등을 심사하는 동시에 이미 세계유산에 올라 있는 147곳의 보존상태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숫자는 세계유산 제도의 현실을 보여준다.

새로 등재하는 일보다 기존 유산을 유지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건축물이 파괴되고, 관광객 증가로 도시의 주거환경이 바뀌며, 대형 개발사업이 경관을 훼손할 수 있다. 자연유산에서는 기후변화와 산불, 가뭄, 해수면 상승, 밀렵과 서식지 단절이 동시에 문제가 된다.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보존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제적인 관리 책임이 시작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유네스코 사무총장 역시 이번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등재는 지속적인 보호와 효과적인 관리, 지역사회가 얻는 혜택을 확보해야 하는 장기적 약속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6곳이 새로 ‘위험유산’이 됐다


이번 부산 회의에서 세계유산 목록이 25곳 늘어났다는 소식 뒤에는 조금 다른 숫자가 있다.

6곳이 새롭게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들어갔다.

앞서 긴급 등재된 남수단 보마-바딩길로 이동경관과 레바논 마운트 아멜 성채, 팔레스타인 세바스티아 외에 수리남의 파라마리보 역사도심, 우크라이나의 고대도시 타우리크 케르소네소스와 그 농업경관, 레바논의 티레가 추가됐다.

위험유산 지정은 세계유산 자격을 박탈하기 위한 경고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해당 유산이 심각한 위험에 놓여 있음을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술과 재정 지원을 집중하기 위한 제도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이 세계유산 관리 문제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는 점도 올해 목록에서 드러난다.

남수단과 레바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유산이 한꺼번에 위험유산 목록에 포함됐다는 사실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국제분쟁에서 결코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유산은 전쟁에서 중립일 수 있을까


전쟁이 벌어지면 유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위험해진다.

전투와 폭격으로 직접 파괴될 수 있고, 관리기관과 예산이 무너지면서 방치될 수도 있다.

관광이 사라져 지역경제가 붕괴하면 주민에게 문화재 보호보다 당장의 생계가 우선될 수 있고, 치안이 약화되면 도굴과 불법거래도 증가할 수 있다.

반대로 역사유적 자체가 정치적·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공격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세계유산 지정은 이를 물리적으로 막아주는 방패가 아니다.

하지만 국제법과 외교적 압력, 복구 지원을 움직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유네스코가 올해 세 곳에 긴급등재 절차를 사용한 것도 유산이 파괴된 뒤 가치만 기록하는 것보다 남아 있을 때 국제 보호체계 안으로 넣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엔나는 위험유산 목록에서 빠졌다…지정은 영구적인 낙인이 아니다


반대 사례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역사도심’은 이번 회의에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외됐다.

비엔나는 고층개발 계획 등이 역사도심의 경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로 2017년 위험유산에 지정된 바 있다. 이후 관리와 개발계획을 둘러싼 조정이 이어졌고, 이번 회의에서 위험목록에서 빠졌다.

이는 위험유산 지정이 한번 내려지면 영구적으로 남는 낙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가와 도시가 위협요인을 줄이고 보존체계를 개선하면 다시 정상 목록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세계유산위원회의 보존상태 심사가 실제 정책을 바꾸는 압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다.


관광객이 늘수록 세계유산이 더 위험해지는 역설


세계유산 등재는 지역에 큰 경제적 효과를 줄 수 있다.

국제적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관광객이 늘고 숙박과 음식, 교통과 문화상품 시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등재가 새로운 위협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관광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으면 오래된 건축물이 훼손되고 쓰레기와 교통문제가 늘어난다. 역사도심에서는 숙박시설이 증가하면서 주민이 밀려나고, 전통적인 생활공동체가 관광산업 중심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계유산의 가치를 만든 것이 건물뿐 아니라 그곳에서 이어져온 삶이었다면, 주민이 떠난 뒤 건축물만 남는 상황이 과연 제대로 된 보존이냐는 질문이 생긴다.

유네스코가 최근 관리정책에서 지역사회의 참여와 지속가능한 관광을 강조하는 배경이다.

부산에서 채택된 작은 섬개도국 전략에서도 유산 보존과 함께 지역사회, 지속가능한 발전, 포용성을 연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후변화는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원칙까지 흔든다


세계유산을 지키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이 원칙을 복잡하게 만든다.

해수면이 상승해 해안 유적지가 계속 침수된다면 원래 위치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지, 산불 위험이 높아진 숲에서 식생을 인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자연유산의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인지, 빙하가 사라지는 자연유산은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작은 섬나라의 문화유산은 더욱 직접적인 위험에 놓여 있다.

마을과 묘지, 전통건축과 해안경관이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의 세계유산 보존은 ‘과거와 똑같이 남겨두는 일’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변화하는 기후 속에서 유산의 핵심 가치를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떤 변화까지 허용하며, 기록과 이전, 복원을 어디까지 활용할지를 함께 결정해야 한다.

유네스코가 부산에서 작은 섬개도국 전략의 핵심 과제로 기후회복력을 제시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한국의 갯벌도 확대…문화재에서 ‘살아 있는 생태계’로 넓어진 유산의 개념


개최국인 한국에서는 기존 세계유산인 ‘한국의 갯벌(Getbol, Korean Tidal Flats)’의 2단계 확장이 승인됐다.

한국의 갯벌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재와 전혀 다른 세계유산이다.

성곽이나 궁궐처럼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조수의 움직임과 퇴적작용, 수많은 저서생물과 철새가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생태계가 유산의 핵심이다.

이 사례 역시 세계유산의 이미지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존해야 할 유산이 돌과 목재로 만들어진 물체에만 머물지 않고 동물이 이동하는 경로, 갯벌과 습지, 인간과 자연이 오랜 시간 함께 만든 문화경관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연유산은 한번 훼손되면 건축물처럼 그대로 복원하기도 어렵다.

철새의 이동경로가 끊기거나 조류 흐름이 바뀌고 갯벌의 생태계가 무너지면 ‘원래 모습’을 다시 만드는 데 수십 년이 걸리거나 아예 불가능할 수 있다.


세계유산이 많아지는 것이 항상 좋은 일일까


세계유산 목록이 현재 1273곳까지 늘어나면서 또 다른 질문도 생긴다.

목록이 계속 커질수록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의 희소성이 약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든 국가가 등재 경쟁에 뛰어들면서 정치적 이해관계가 보존 판단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세계유산 등재는 전문기구의 평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최종 결정은 21개국 대표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가 내린다.

때문에 자문기구의 권고와 최종 결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국가 간 외교와 정치적 고려가 개입한다는 비판도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이번 부산 회의에서는 모든 신규 등재 결정이 합의로 채택됐다. 유네스코는 이를 세계유산협약의 협력 정신을 보여주는 결과로 평가했다.

다만 세계유산 목록의 대표성을 넓히는 것과 등재 기준의 엄격함을 유지하는 일은 동시에 풀어야 할 과제다.

지역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특정 지역의 유산을 기계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제도적·재정적 한계 때문에 세계적 가치를 제대로 입증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지역이 동등한 조건에서 평가받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부산 회의가 보여준 변화는 ‘무엇이 위대한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


이번에 새로 등재된 25곳을 한 가지 특징으로 묶기는 어렵다.

핀란드의 20세기 모더니즘 건축도 있고, 남수단의 야생동물 이동경관도 있으며, 코모로의 역사도시와 상투메프린시페의 식민 농업 시스템, 노르망디의 전쟁 기억 공간도 있다. 모두 전혀 다른 시대와 지역, 성격을 가진 장소다.

오히려 이 차이 자체가 현재 세계유산 제도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무엇이 인류 공동의 유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더 이상 고대 문명과 거대한 기념물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배자의 궁전만큼 강제이주의 흔적이 중요할 수 있고, 화려한 도시건축만큼 동물의 이동경로가 중요할 수 있으며, 오래된 성당만큼 전쟁을 기억하는 해변이 인류에게 중요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세계유산의 진짜 시험은 등재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부산에서 세계유산 25곳이 새로 탄생했지만 회의의 더 중요한 메시지는 목록을 늘렸다는 숫자보다 그 이후에 있다.

세계유산은 명예칭호가 아니다.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국제 브랜드도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의 전부가 아니다. 세계유산협약은 특정 국가의 장소라 하더라도 그 가치가 인류 전체와 관련돼 있다면 국제사회가 함께 보존 책임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번 회의에서 새로 등재된 세 곳이 동시에 위험유산으로 지정되고, 기존 유산 세 곳이 추가로 위험목록에 들어간 사실은 그 원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전쟁과 도시개발, 관광과 기후변화 속에서 그 가치를 실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바뀐 세계유산 지도는 세계 명소가 25곳 늘어났다는 이야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코모로와 상투메프린시페, 남수단이 처음 지도에 등장했다는 것은 그동안 세계유산의 시야 밖에 있던 역사와 자연을 인류 공동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범위가 넓어졌다는 뜻이고, 식민지 플랜테이션과 전쟁의 해변, 야생동물의 이동경로가 한 목록에 함께 들어간 것은 우리가 ‘유산’이라고 부르는 대상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유산의 다음 경쟁은 어느 나라가 더 많은 명소를 갖고 있느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무엇을 인류 공동의 기억으로 인정할 것인지, 그리고 인정한 뒤 실제로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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