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홍수 피해, 국가에 청구할 수 있나…기후소송과 재난배상 사이의 세 가지 문턱
폭염과 홍수 피해를 국가에 청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짧은 답은 ‘원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기후변화 자체만으로 곧바로 배상책임이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법체계에서 재난 피해의 국가배상은 막연한 정책 실패보다 구체적인 법적 의무 위반, 손해의 특정, 그리고 두 요소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구조로 판단된다. 기후소송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난 피해 배상으로 이어지려면 기후과학과 재난관리, 손해배상 법리가 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맞물려야 한다.
이 점은 기후위기 대응을 둘러싼 헌법재판소 판단과 일반적인 국가배상 법리를 함께 보면 더 분명해진다. 헌법재판소는 2024년 8월 29일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기후변화로 생명·신체의 안전 등이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에 대응할 국가의 의무가 환경권 보호의무에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결정은 곧바로 개별 재난 피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기후대응 의무를 헌법적으로 확인한 판단과, 특정 폭염·홍수 피해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민사적·행정법적 판단은 같은 층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헌재 결정이 보여준 것과 보여주지 않은 것
헌법재판소 결정의 핵심은 국가가 기후위기를 장래의 정책 선택 문제로만 미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다. 재판소는 2030년 감축비율 수치 자체보다, 2031년부터 2049년까지 이어지는 후속 감축 경로와 부담 배분이 법률에 충분히 제시되지 않아 미래 세대에 과도한 부담을 넘길 수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 결과 해당 조항은 2026년 2월 28일까지 개정될 때까지 계속 적용되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2026년 4월 개정된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는 부문별 감축목표와 연도별 감축목표의 설정, 5년마다의 재검토, 목표 설정 시 고려해야 할 요소, 공청회 등 의견수렴 절차를 법률 차원에 추가했다. 이는 국가의 기후대응 틀을 더 구체화한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개별 폭염 사망, 침수 피해, 농작물 손실에 대해 국가가 자동으로 배상책임을 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헌재 결정은 국가의 보호의무를 확인한 것이지, 모든 재난 손해의 법적 원인을 국가에 귀속한 판결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난 피해 청구에서 실제로 부딪히는 세 가지 문턱
폭염이나 홍수 피해를 국가에 청구하려면 보통 세 단계의 입증이 필요하다. 첫째는 사건 수준의 원인귀속이다. 해당 폭염이나 집중호우가 단순한 자연변동이 아니라 인간 활동에 의한 기후변화 때문에 발생 가능성이 얼마나 커졌는지, 또는 강도가 얼마나 증폭됐는지를 보여야 한다. 최근 기후소송에서 이른바 원인귀속 과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법적 의무 위반이다. 국가배상법 제2조는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손해를 입힌 경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배상책임을 규정한다. 또 제5조는 도로, 하천, 제방, 배수시설 같은 공공영조물의 설치·관리 하자가 있는 경우의 책임을 다룬다. 결국 재난 피해 소송은 ‘기후변화가 있었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고, 경보 발령, 위험지역 통제, 대피 조치, 취약계층 보호, 배수·치수 시설 관리 같은 구체적 재난관리 의무가 해당 시점과 장소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따지게 된다.
셋째는 손해액의 특정과 상당인과관계다. 피해자가 입은 사망·상해·영업손실·주택 침수·농업 손실 가운데 무엇이 어느 정도로 그 의무 위반 때문에 발생했는지를 금액으로 산정해야 한다. 기후재난은 원인이 한 갈래가 아니어서 이 단계가 특히 어렵다. 같은 홍수라도 강우 강도, 지형, 하천 정비 상태, 사전 경보, 주민 대피 여부, 건축물 위치와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책임’보다 ‘재난관리 실패’가 더 직접적인 쟁점이 될 수 있다
실무적으로는 국가의 온실가스 감축정책 전반을 문제 삼는 청구보다, 특정 재난에서 예견 가능했던 위험에 대해 공권력이 필요한 조치를 했는지를 묻는 청구가 더 직접적인 경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 판례도 공무원의 부작위 책임을 폭넓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에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이 있고 국가가 본래적으로 위험 배제에 나서야 하는 경우에는 작위의무가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 의무가 실제 사건에서 어느 정도로 구체화됐는지는 별도로 따져야 한다.
홍수나 하천 사고 관련 판례에서도 법원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무한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하천이나 공공시설이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기준이 아니라, 해당 시설의 위험성에 비례해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정도의 방호조치를 했는지가 판단 기준이 된다. 이 기준을 기후재난에 대입하면, 폭염 쉼터 운영만으로 충분했는지, 침수 취약지역 배수와 통제가 적절했는지, 반복 피해 이력이 있는데도 관리 수준을 높이지 않았는지처럼 훨씬 구체적인 쟁점으로 내려오게 된다.
즉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승소하려면 ‘지구온난화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큰 문장보다 ‘국가나 지자체가 이미 예견 가능했던 위험 앞에서 해야 할 조치를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내 피해가 확대됐다’는 작은 문장을 더 촘촘하게 증명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기후정책 일반의 위헌성 판단과 개별 재난의 배상책임 판단이 만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해외 흐름은 문을 넓히지만, 배상까지는 아직 높은 문턱
해외에서도 기후소송은 빠르게 늘고 있다. 런던정경대 그랜섬연구소의 2026년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에만 249건의 새 기후소송이 제기됐고, 1986년 이후 누적 사건은 3600건을 넘었다. 사건이 제기된 국가는 62개국으로 늘었다. 유엔환경계획도 2025년 기준 전 세계 기후소송이 55개 국내 관할과 24개 국제·지역 재판·준사법기구로 확산했다고 정리했다.
다만 이런 증가세가 곧바로 손해배상 인용의 확대를 뜻하지는 않는다. 같은 그랜섬연구소는 2026년 보고서에서 기업이나 대규모 배출자의 기후 기여를 근거로 손해배상이나 행태 변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오염자 부담’ 유형 사건이 늘고 있지만, 아직 그 유형에서 실제 배상 지급이나 행동 변경 명령으로 확정된 사례는 없다고 정리했다. 기후소송이 법원의 문턱을 넘는 사례는 많아졌지만, 재난 피해를 돈으로 환산해 책임을 귀속하는 단계는 여전히 가장 어렵다는 뜻이다.
이 흐름은 국가 상대 청구에도 시사점을 준다. 법원은 점점 더 기후과학 자체를 낯선 주장으로 보지 않게 됐지만, 그 과학을 개별 사건의 법적 인과관계로 번역하는 일은 여전히 별개의 과제다. 폭염과 홍수 피해 청구에서 중요한 것은 전 지구적 배출 책임의 일반론만이 아니라, 특정 사건의 기상·수문 자료, 당시 경보와 행정조치, 피해 장소의 관리 상태, 취약계층 보호 여부, 손해 산정 방식 같은 현장 자료가 된다.
결국 가능한가
정리하면, 폭염과 홍수 피해를 국가에 청구하는 길은 한국 법상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청구가 곧바로 ‘기후변화 책임 소송’이라는 이름만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재판에서는 기후변화의 기여도, 국가나 지자체의 재난관리 의무 위반, 피해액의 구체적 산정이 각각 분리된 쟁점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앞으로의 핵심은 두 갈래다. 하나는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강화된 국가의 기후대응 의무가 법률과 계획에서 얼마나 더 구체화되는지다. 다른 하나는 반복되는 폭염과 침수 피해 현장에서 그 의무가 경보, 대피, 시설관리, 취약계층 보호 같은 행정행위로 실제 집행됐는지다. 재난 피해를 둘러싼 국가 책임은 이 두 갈래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현실의 손해배상 문제로 바뀐다.
자료: 헌법재판소,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 제42조 제1항 제1호 위헌확인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사건 결정(2024.8.29);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ㆍ녹색성장 기본법(2026.4.7. 일부개정, 2026.10.8. 시행 법령 기준);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국가배상법;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런던정경대 그랜섬연구소, Global trends in climate change litigation: 2026 snapshot(2026.6.25); 런던정경대 그랜섬연구소, Science in the courtroom: evidentiary needs in climate litigation(2026.3.10); 유엔환경계획, Climate Change in the Courtroom: Trends, Impacts and Emerging Lessons(2025)
